담화 1
믿음은 눈감기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증거 없이 무언가를 믿는 것이다." 어디선가 이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무신론 저술가들이 즐겨 쓰는 정의이기도 하고, 솔직히 적잖은 그리스도인들도 은연중에 이렇게 생각하며 삽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 증거를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 저도 사양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신이 이 정의를 거부합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이렇게 엽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1-4, 개역개정
"목격자",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 이것은 역사가의 언어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서두에서도 예수의 부활을 "확실한 많은 증거"(행 1:3)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아덴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청중 자신의 시인(詩人)을 인용하며 논증을 폅니다(행 17:16-34). 심지어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 성경의 하나님은 맹목적 동의가 아니라 대화를 청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거의 다 이렇게 작동합니다. 저는 유체역학을 전혀 모르지만 비행기에 탑승합니다. 공학의 모든 수식을 검증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증거 — 수십 년의 안전 기록, 정비 체계, 조종사의 자격 — 에 근거해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맹신도 전지(全知)도 아닌 제3의 것, "근거 있는 신뢰"입니다. 신앙은 이 앎과 다른 종류의 앎이 아니라 같은 구조를 가진 앎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벧전 3:15). 변증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다만 이 명령에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 "온유와 두려움으로." 여기까지가 명령의 전부입니다.
나는 태양이 떠올랐음을 믿듯이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 「신학은 시인가?」(Is Theology Poetry?, 1944) · 『영광의 무게』 수록
담화 2
질문의 지도 —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까요
큰 질문을 다 답하고 나서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제가 아는 어떤 신학자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답이 아니라 좋은 지도입니다.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도를 손에 쥐는 것과 그 도시를 다 걸어보는 것은 다릅니다. 하지만 지도가 있으면 적어도 길 잃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아래 여섯 질문은 이 사이트 전체로 가는 지도입니다. 당신을 붙드는 질문 하나를 골라 그 길을 따라가 보세요.
과학과 신앙은 싸우는 사이인가요?
진화, 빅뱅, 우주의 나이 —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주일에 듣는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은 정직한 것입니다.
성경을 정말 믿을 수 있나요?
필사 과정에서 오류는 없었는지, 지금 우리 손의 성경이 원래 쓰인 것과 같은지 — 신앙의 기초를 흔드는 정당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고통이 있나요?
가장 오래된 질문이자, 가장 개인적인 질문.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묻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AI와 기후 위기의 시대, 신앙은 무엇을 말하나요?
고대 문헌인 성경이 21세기의 가장 새로운 질문에도 할 말이 있을지 궁금하실 겁니다.
담화 3
따져 묻는 법
좋은 질문에는 기술이 있습니다. 이 담화는 이 사이트 전체가 쓰는 도구 상자를 미리 보여드립니다.
회의(懷疑)에도 좋은 회의와 나쁜 회의가 있습니다. 나쁜 회의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정작 자기 전제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 "과학은 늘 옳다"거나 "종교는 늘 자기기만"이라는 믿음 자체는 좀처럼 검증대에 오르지 않습니다. 좋은 회의는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잣대를 댑니다.
탐정을 떠올려 보세요. 유능한 탐정은 증거 하나로 범인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가설을 모두 세운 뒤, 증거로 하나씩 좁혀갑니다. 이것이 "추론 최선 설명(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입니다. 수학적 증명과는 다르지만, 역사학·과학·법정에서 우리가 실제로 쓰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JH 시리즈가 부활을 다루는 방식도 정확히 이것입니다 — 경쟁하는 가설들을 나란히 놓고 증거로 저울질합니다.
세계관을 비교할 때는 세 가지 저울을 씁니다. 첫째, 정합성 — 그 세계관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는가. 둘째, 설명력 — 그 세계관은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것(도덕, 이성, 아름다움, 고통)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 셋째, 살아낼 수 있는가 — 그 세계관을 끝까지 밀어붙여 살아도 무너지지 않는가. 세 저울 모두에서 이겨야 좋은 세계관입니다.
루이스는 무신론자였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주가 그토록 잔인하고 불의하다는 것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내 논거였다. 그런데 '의롭다', '불의하다'는 생각을 나는 대체 어디서 얻었는가? 곧은 선의 개념이 없는 사람은 선이 구부러졌다고 말하지 못한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부 1장
악에 분노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곧은 선 — 정의의 기준 — 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뒤집기의 본편은 PE 시리즈에 있습니다.
담화 4
변증의 한계와 예의
논증은 사람을 회심시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변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변증의 정확한 역할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 장애물을 치우고, 신앙이 지성적으로 정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회심 자체는 성령의 일입니다. 그래서 상대는 이겨야 할 논제가 아니라 만나야 할 사람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기는 대화와 얻는 대화는 다릅니다.
의심하고 계신 신자에게는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의심은 배교가 아니라, 자라는 신앙이 지나는 하나의 통과 지점일 수 있습니다. 한 아버지는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이 모순된 문장이 그대로 성경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입니다. 유다는 이렇게 권합니다 —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이 사이트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반대편의 논거는 최강의 형태로 제시하고, 미해결은 미해결로 표기합니다. "과학이 하나님을 증명했다"는 식의 과장은 이 시리즈 어디에도 없습니다 — 그런 확신이 필요했다면 애초에 이 사이트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담화 5
나의 길 찾기
같은 산도 오르는 길은 여럿입니다. 당신의 질문에서 시작하세요. 아래 세 질문에 답하시면, 당신에게 맞는 첫 시리즈를 추천해 드립니다.
청소년이라면 각 시리즈의 '청소년 버전'으로, 대학생·성인이라면 '대학생 버전'으로 시작하세요. 어느 쪽이든 언제든 갈아탈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들이 드리려는 것은 논쟁의 승리가 아닙니다. 안셀무스는 이것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 불렀습니다 — 이미 믿는 자가 그 믿음을 더 깊이 이해하려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지도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걸으실 차례입니다.